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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평전' 그 때 그 사건----김건희 봉하마을 방문을 계기로 다시 읽는----
영부인 김건희가 최근(6.13) 봉하마을을 찾으며 내놓은 방문의 변(弁)을 통하여 , 尹대통령 부부가 노무현을 늘 존경해왔고, 특히 영화 '변호인'을 보고는 며칠간 많이 울었기 때문에, 그 노무현을 시노부(偲ぶ : 그리워 하는) 마음에서 한번 찾아 뵙게 되었다고 대답을 했다 합니다.
그렇다면 김건희의 이 때이른 봉하마을 방문을 계기로 하여, 노무현이 얼마나 존경스러웠던 사람이었나를 평가해 보기 위해 '노무현 평전(評伝)'을 한번 다시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대로 된 '노무현 평전'이라면 그 평전 안에 꼭 들어있어야할 대목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춰 한번 재조명해 보도록 하지요.
자, 들어가 보십시다.
우선 1990년 '3당합당'이 이루어질 때의 시점(時点)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한편으론 '3당야합'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 노태우-YS-JP의 통합정당(민자당)에, 당시 'YS 사람'이었던 노무현은 왜 따라 들어가지 않았을까요?
이 때 노무현의 행동을 두고 세간의 평가는 둘로 엇갈렸습니다.
첫번째 평가는, 노무현이 '3당야합'에 따라가지 않고 정치인으로서의 원칙과 지조와 양심을 지켰다는 평(評)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토코(男 : 사나이)로서의 줏대와 자존심을 지킨 노무현으로부터 '남자의 향기'마저 피어 올랐다고 이야기 되어진 것은, 인정받아야 할 대목으로 여겨집니다.
(사족) 그러나 이 '구다리(くだり=대목, 즉 이른바 3당야합)'를 놓고 김지하 시인은 나중에 무슨 이유에선지 YS를, YS시대를 그런대로 평가해 주는 듯한 발언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소개드릴 '김지하 평전'에서 자세히 설명 드리지요.
아무튼 3당합당에 합류하지 않았던 노무현은, 지조와 원칙이라는 정치인의 덕목을 한국정치사에 '레가시'로 남기고 있다는 점에서, 평가받을 만한 인물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이제부터의 필자의 이야기를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노무현에 대한 세간의 (다른 각도의) 두번째 평가입니다.
노무현이 그 때 3당합당에 참가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앞날에 대한 철저한 정치적 계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노무현이 그 때 YS를 따라가 YS에 붙어 있는다 했을 때, 노무현에겐 별로 미래가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즉 노무현에게 학벌이 있습니까, 인맥이 있습니까, 특별한 능력이 있었습니까?
부산상고 나와서 피똥 싸며 책이나 파서 간신히 사시에 합격했으며, '이혼 (담당) 변호사'로서 돈이나 좀 번 변호사였질 않았나요?
YS가 찾아 들어간 보수 진영(여권)에는, 명문 경남고ㆍ부산고 출신에다, SKY 출신들이 철옹성을 이루고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노무현이 과연 어디다 명함을 내밀 수가 있었을까요?
노무현도 그 판세를 읽었을 겁니다. 그리고 나서, DJ가 이끄는 진보 진영(야권)으로 발길을 돌리는 선택을 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노무현이 롤모델로 삼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고건 氏였다고 하는군요.
전라도 출신의 고건은 이전의 경상도 정권(박정희 정권 이래)에서 구색 맞추기(지역안배) 용으로 발탁되어 반듯하게 기용되어 왔질 않습니까?
3당합당 시의 바로 그 순간 섬광처럼 생각이 떠오르며 노무현의 갈 길(행동)이 정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 DJ에게로 가자. 전라도 출신인 DJ는 부산 사람인 '나 노무현'을 인정해 줄 것이다!"
노무현은 그 정도로 '통밥을 굴릴' 머리는 되었을 겁니다. 즉 그런 정치구도를 읽어내고 계산할 수 있는 머리는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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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고-부산고-SKY가 삐까번쩍하며 판을 치는 영남정권인 민자당 쪽으로 가서 '오뉴월 구정물통의 참외껍질' 취급을 받느니보다, 호남의 영주(領主)인 DJ에게로 가서 지역안배 차원에서 부산사람으로서 대접과 인정을 받는 쪽이, 출세가 빠르고 자기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그렇게 노무현은 판단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상으로 노무현이 3당합당에 참가하지 않은 것에 대한 세간의 두가지 엇갈리는 평가에 대해 소개를 다 해 드렸습니다. 어느쪽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의 판단은 독자분들의 몫일 것입니다.
(사족) 노무현은 과연 부산지역에서 그 이름을 도도로카세타(轟かせた : 널리 알린) 유능한 법조인(변호사)였을까요? 노무현이 행동한 것을 잘 살펴보면 그에 대해 바르게 판단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노무현의 형은 그 당시 그쪽 지역의 세무공무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연계를 통해 노무현은 변호사로서 세무관련사건의 수임을 많이 받았다고 하지요. 그걸로 많은 돈을 번 것 같습니다. 또한 이혼 사건을 많이 맡아 또 엄청난 돈을 손에 넣을 수가 있었다는데요. 그러니까 '세무'와 '이혼'이 노무현에게는 커다란 두개의 돈줄이었다는 셈이지요. 여기서, 두개의 돈줄을 틀어쥐고, 노무현은 아주 빠르고 밝은 '계산력'를 기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입니다. 이 계산력이 3당합당시 YS와 결별하고 DJ를 선택하는 데 발휘되었다고 보면 지나친 억측일까요?
(사족) 그러나 노무현이 영화 '변호인'에서 보여졌드시, 인권변호사로서, 그리고 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저항가로서의 행동을 남기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노무현은, 아주 야누스적인 모습을 가진, 국민들에게는 애증이 교차하게 해주는, 그런 반반(半半)의 인물로서 역사에 남게될 것으로 보입니다.
(사족) 노무현의 공죄(功罪 : 공과)를 논할 때, 빠뜨려서는 안 되는 이야기가 또 한가지 있습니다. 그의 자살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오토코(男)의 명예(또는 하지・恥)와 자살----이는 필자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사안(事案)이니 때를 봐서 나중에 말씀 드리도록 하지요. 그럼 오늘은 이만 "사요나라 사요나라 사요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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