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he World

홍범도 흉상, 일제(日帝)-레닌 밀약에 의한 '자유시 참변'의 진실 밝혀지면 철거되어 그냥 고철덩이? 잠수함 홍범도함(艦)도 개명될 듯

728x90
반응형

홍범도 흉상, 일제(日帝)-레닌 밀약에 의한 '자유시 참변'의 진실 밝혀지면 철거되어 그냥 고철덩이 될 수도. 잠수함 홍범도함(艦)도 개명될 듯

육사에 설치되어 있는 홍범도(洪範図, 1868.8~1943.10) 흉상이 육사 밖으로 철거될 것으로 보입니다.
국방부와 육사에서 尹에게 철거의 뜻을 '호노메카스토(仄めかすと : 넌즈시 알리자)' 尹이 "그렇게 하라"고 답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尹까지 그러한 뜻에 '노리다스토(乗り出すと : 솔깃해 하며 이전을 추인하자)',
홍범도 흉상의 이전 문제는 정지권의 대형 이슈로 비화하고 말았습니다.

이재명은 항의의 뜻으로----홍범도 흉상 건, 후쿠시마 원발(原発) 처리수 건 등을 문제삼으며---- 8월 31일부터 국회에서 '헝거 스트라이키(hunger strike)'를 시작했습니다.

이재명이 타이밍을 잡는 감각은 살아있는 것 같다. 제법이다. 이로써 검찰의 소환조사, 구속영장청구, 기소 등에 있어 일정도 얼마간 차질을 빚을 듯하다. 그게 이재명의 노림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국은 '사즉생'이 아니고 '사즉사(死即死)'일 뿐. 그래 봤자 궁지에 몰린 '이누(犬)'가 다만 짖어대는 일에 불과할 것이라고 '야지우마(やじ馬 : 떠드는 이)'들은 떠들고 있다.


사실, 지금 전제군주와도 같은 권력의 수퍼스타 尹이 '아또오시(後押し : 뒷밀이)'를 해줬기 때문에, 이번 일이 크게 번졌다고 보는 시각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첫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에 결국에 가서는 이번 사태가 크게 터졌다,고 보는 견해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홍범도는 원래 논란의 여지가 있었던 인물인데, 너무 성급하게, 너무 과(過)하게 민족의 영웅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비판들입니다.

출생도 머슴 아버지에 초(超)빈곤 가정에서 태어났고, 본인도 머슴을 하다가 사냥꾼 등으로 생계를 삼으며 유랑하던 신세였습니다.

그러니까 홍범도에 있어 사상이나 철학, 이념이나 비전, 가치관 등을 '미니 소나에테(身に備えて : 습득하여 몸에 지니고)' 다닐 형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보통 「저런 부류의 사람들이 총을 잡을 때는 '테러리스트'가 될 수도 있다」는 경계의 목소리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요.

소련 군복을 입은 그의 흉상을 2018년 3월 육사에 소리소문 없이 설치했던 것도 '마즈깟타(不味かった : 서투른)' 짓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생계형 독립운동가는 아니었을 터의 홍범도...


그 때 '코뮤니스트(コミュニスト=communist)'로 의심받는 문재인의 서슬이 시퍼런 가운데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지만, 누구라도 洪의 흉상설치에 문제제기를 했더라면, (육사 설치가 아닌)  '어떤 다른 방식으로 하자'라는 이야기가 필경 나왔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홍범도가 초기에 독립운동을 했던 것은 맞습니다. 3.1운동 전과 후의 몇년간 씩 국경지대와 북간도 등지서 '광야의 사나이'가 되어 말(馬)을 달린 것은 사실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때의 홍범도에 대해서는 '손케이노 넹(尊敬の念 : 존경심)'을 표하고 싶습니다마는.

그러나 그 후가 문제가 됩니다. 홍범도는 러시아의 적군에 넘어가게 된답니다.
홍범도는 레닌과 수회(数回) 면담을 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홍범도가 관여했을 것으로 추리되는 그 미스터리의 '자유시 참변'1921년 6월에 발생합니다.

홍범도는 이 '자유시 참변'의 결과를 보고(報告)하기 위해 레닌을 만나러 갔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유시참변 때 조선의병・독립군의 학살의 선봉에 선 것으로 의심받고 있는 홍범도.

  

홍범도가 레닌을 만나 어떤 내용으로 보고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공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때 레닌과의 면담 내용을 홍범도가 친필기록으로 남긴 게 있다고, 폭로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의심은 계속 증폭되고 있습니다.

홍범도는 과연 레닌에게 무슨 내용으로 보고를 했을까요?

요새 보수권 인사들은, 그 때 홍범도가 레닌으로부터 권총도 하사받고, 돈도 받고, '노치호도(後程 : 얼마 후에는)' 대위(or 대령)으로 승진되었다고 주장하고들 있습니다.

결코 일제로부터의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원받기 위한 면담은 아니었고, 레닌에 아부하기 위한 면담이 아니었나 하고, 보수계는 洪에게의 의혹을 부풀리고 있습니다.

洪에 대해 계속되는 의심은, 바로 일본제국주의와 레닌의 밀약(密約)에 洪이 하수인 수장(首長)역을 맡았을 것이라는 추측에서 최고조(最高調)에 이르고 있습니다.

무슨 얘기냐고요? 일제는 그 때 소련땅 연해주 부근(블라디보스톡 등지)에 조선의 의병들이 군집・거주하면서 (만주땅에까지 무대를 넓혀) 활동하자 무척 성가셔 했고, 그래서 레닌에게 그들을 제거해 달라 요청했다 합니다.

그에 레닌도 어느정도는 응답을 해야했을 겁니다. 일제가 조선 의병들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직접 연해주로 들어가게 되면, 러시아(소련)와 일본은 또한번 전쟁을 치뤄야 하는 상황에 맞부닥칠지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과거 일(日)-러(露) 전쟁에 패배했던 트라우마에다가, 볼셰비키 혁명후 소비에트 건국에 힘을 쏟아야 할 정세(情勢)하의 레닌은, 일본 측과 대립하는 것은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러시아는, 일제와의 밀약 하에 일본의 요청을 받고, 연해주에 진치고 있던 조선의 의병(독립군)들은 해체하는 과정에 돌입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하여 러시아의 적군은 조선의병들을 모두 자유시(알렉세예브스크)로 몰아넣고, 참혹하게 압살해 버리는데, 이것이 바로 일종의 '제노사이드(ジェノサイド :  genocide : 대량집단살해)'로서의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이 러시아 적군이라기보다는, 상해 임정에서 국무총리를 '해처먹은' 이동휘라는 자와 그리고 목하 '토키노 히토(時の人 : 최고화제의 인물)'로 부활해 있는 홍범도라는 인물에 있다는 것이, 민족의 비극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들고 있다는 평(評)들입니다.

러시아 적군이, 조선독립군・의병들로 하여금 자유시로 모이게 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은, 이동휘를 통해서 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리고 고려공산당 멤버이기도 한 이동휘의 직속부하가 바로 홍범도였다는 얘기입니다.

반응형


이동휘는 원래부터 이상한 코뮤니스트로서 '소노 나오 하세테 이타가(その名を馳せていたが : 그 이름을 날리고 있었지만)', 그래서 별 놀랄 일도 없지만, 이 대목에서 홍범도가 등장하고 있는 것은 꽤나 쇼킹하지 않을 수 없지요?

아무튼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을 치른 후에 그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레닌을 찾아가 면담을 했다는 전언(伝言)입니다.

그 때 洪은 레닌으로부터 권총과 군복을 하사 받고, 돈까지 하사받고(몇백만 루블?), 계급도 올려 받고 하여, 그야말로 '하나부타이(🌻花舞台 : 꽃무대)'에 섰었다는 게, 보수권 인사들의 주장입니다. 조선을 배신하고 '로스케(露助) 놈들'에게 붙었다고 하는 비판들입니다.

그 때 홍범도가 레닌을 만난 것에 대해, 물론 소위 혁신계 인사들은 자유시참변의 보고(報告) 때문이 아니라, 고려공산당 라인이 레닌으로부터 군수품을 보급받기 위해서였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의심을 더 해보면, 洪이 레닌으로부터 그 많은 돈을 받았다고 가정했을 때, 과연 그 돈을 어디에 어떻게 썼겠느냐 하는 점입니다. 혼자 썼을까요? 누구와 같이 썼을까요? 과연 洪은 그 돈을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이동휘에게 갖다 바쳤을까요? 그렇다면 얼마만큼을 바쳤을까요? 그러면 이동휘는 그 돈을 상해임시정부를 위해 썼을까요, 아니면 자기의 개인착복을 했을까요?

그런데 이 무렵부터 확실히 드러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홍범도는 자유시참변(1921.6)으로 레닌과 러시아(露)의 적군으로부터 받은 꽤 많은 돈이 있었을 것으로 추론되지만, 1920년대 초반이후는 내내 (무장)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는 분석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한몸만 호화롭게 잘 지냈다는 얘기인가요? 嗚呼~! 게다가 말년에 가서는 소련 공산당으로부터 연금까지 잘 챙겨 받았다고 합니다.

물론 좀 자비로운 시선에서 그를 평가하자면, 그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고는 있었기 때문에, 또 그는 1943년에 사망하여 북한공산주의와의 직접적인 관계도 없기 때문에, 그가 국가훈장을 수여받은 일에 대해 인정해 줄 수는 있겠습니다.

그러나 과연 육사에 그의 흉상을 세울 정도냐 하면, 그 정도는 아닐 것이라는 게 유식자회의(有識者会議=expert panel)의 견해이기도 합니다. 독립기념관 정도의 곳에 세우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의견 같아요.

대한민국 육사는 현재로서는 공산주의 북한・중국・러시아를 적(敵)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소련군복을 입고 있는 사람에게 계속 경례하고는만 있을 수는 없질 않겠습니까? 따라서 洪의 흉상을 육사에서 빼는 것은 맞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육사의 창립 목적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보더라도 洪의 흉상은 옮기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한국전쟁(6.25)의 백그라운드에 있었던 나라는 소련과 중국이 틀림이 없질 않습니까? 고(故)로 아직도 종전이 안 되어 있는 상태에서 대(大)한국으로서는 저들에게 갚아줘야 할 빚이 남아있지 않을까요? 일본에 대해서는 그렇게 모질게 기억하면서도, 때국놈들과 로스케놈들에 대해서는 왜 그리 너그럽게 봐 주시려고 하시는지요?

독립운동을 조금 했다 하여 소련과의 관계가 이상하게 깊었던 사람에게 계속 경례하는 일은 그리 상쾌한 일은 아닐 것으로 보여집니다.

@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