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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서 부르는 소리

영화평론가 정영일, 경음악평론가 최경식, 그리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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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청소년시절 영화보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영화평론가 정영일 선생(1928~1988.8.25)에 대한 일종의 로망을 품고 있었다.
영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당연히 영화음악도 즐겨 들었다.
그래서 방송을 통해 영화음악도 많이 해설해 주었던 당시 경음악평론가 최경식 선생도 좋아했었다.

오늘은 정영일 선생을 먼저 추상(追想)해 보고 싶다.
1984년 어느 이른 봄날에 광화문 근방에서 만난 정영일 선생에 대한 추억과 그 때의 그 풍경은, 언제나 필자의 마음에 고요히 남아 있다. 정영일 선생과 만났을 때의 그 감회를  적은 글(2013년 6월 13일=記)은 바로 아래에 올려 놓는다.

 

 



그런데 1984년 정영일 선생을 만날 때, 바로 그 때, 필자는 필자에게는 또 한명의 '우상'이었던 최경식 선생에 대한 소식을  정영일 선생에게 물어봤었다. 최경식 선생이 그 무렵 방송에 나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경식 선생이 왜 방송에 나오지 않느냐고 정영일 선생에게 물어봤던 것인데, 정영일 선생은 짤막하게 답해 주었다. -- "그 친구 미국 갔다는데..."
필자는 물었다. -- "아니, 왜요?"

 

정영일 선생은 최경식 선생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말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필자는 왜 최경식 선생이 조국을 떠나 미국에 갔는지 늘 궁금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 서울 서초동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에 가서 최경식 선생에 대한 검색을 해 봤더니, 선생의 책이 한권 히트되었다. 바로 '영혼을 울리는 음악이야기'라는 책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대출받아 서문과 에필로그 등을 읽어 봤더니, 최경식 선생이 70년대말의 고달픈 시대상황속에서 조국을 떠나기로 마음 먹고 미국으로 이주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게 되었다.


필자는  서운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서운하고 또 서운한 마음에 그 책  '영혼을 울리는 음악이야기'를 단숨에 독파해 버렸다.

역시 최경식 선생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최경식 선생에 대한 자세한 추상(追想)은 다음 기회로 넘기고,

오늘은 먼저 정영일 선생에 대한 추상으로 2021년 이 봄날의 '눈물어린' 서정을 달래보고 싶다.    


 
아래 보시지요. 아래에 있는 글은 
정영일 선생을 추상(追想)하며

2013년 6월 14일에 어느 SNS페이지에 투고한 글입니다.
해마다 봄이 오면 정영일 선생을 처음 만났던 일을 떠올리며
 그를 추상(追想)하게 됩니다.

올해도 마찬가지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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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이른 봄날의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어느 날,

필자는 정영일 선생을 만났다.

광화문 조선일보사 소년조선일보 주간실에서 만났다.

 

 

 

필자는 평소 KBS명화극장에서 그의 '아저씨 같은 해설'을 들으며 그(he)라는 인간에 익숙해져 있기는 했지만,

그러나 '검은 독꼬리'의 좀 우중충한 이미지가 그에게는 따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처음 만나는 기분이 그다지 신선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실제로 만나보니 그는 아주 '젠틀'하고 '저스트'했다.

그리고 까다로운 듯한 행동은 조금도 보여주지 않았다.

후덕하고 친절한 행동으로 상대방을 단번에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갔다. 

 

TV에서 본 얼굴은 좀 어두운 부분도 있었으나,

실제로 본 그의 얼굴은 밝았고 세련되었고 지적이었으며 아주 스마트했다.

20~30분간 정도에 그친 짧은 만남이었지만, 필자는 선생을 만난 감흥이 아주 오래 갔었다.

 

헤어질 때 선생은 자기 차를 타고 갔고, 필자는 광화문과 종로1가를 걸으며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사무실로 돌아갔다.

 

이 장면이 기억이 나는 것은, 헤어질 때 정영일 선생이 "○선생, 차 가지고 오셨어요?"하고 필자에게 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당시 필자로서는 젊은 시절이라 돈도 그다지 없었고 당연히 차도 안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종로거리를 걸어서 돌아갔던 것이다. ^^ 

 

그 후에도 몇번 선생의 댁으로 전화를 넣은 적이 있다. 온화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아주던 선생이었다.

필자는 일본에 가서는 "일본의 정영일"이라고 할 수 있는 요도가와 나가하루(淀川長治)라는 영화평론가를 알게 되었다.

 

요도가와 씨는 아사히 TV "일요양화(洋画)극장"의 명해설가로서 일본인 남녀노소의 누구나로부터도 존경과 사랑을 얻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요도가와 씨도 정영일 선생도 이 세상에 없다. 필자도 "늙었다."

정영일 선생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조차도 알지 못하고 지냈다. 세월이 미울 뿐이다. 

 

필자는 선생을 잊지못하는 마음에서 선생이 남긴 영화평들을 때때로  되새겨 보기도 한다. 해마다 봄이 오면 광화문에서 선생을 처음 만났던 일이 생각이 난다.  (2013년 6월 14일=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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