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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memoirs) -- 시인 청마 유치환의 사랑과 문학
청마의 친일적 기고문이나 행적이
친일인명사전에서 빠졌다니 참 다행스럽다.
근래 통영을 다녀왔다. 청마 문학관도 들렀고 청마 거리와
우체국도 지나면서 보았다.
통영시 정량동 망일1길 48번지에
청마문학관이 있고, 태평동에는 초갓집 생가(유약국)가 복원되어 있다.
문학관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위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금요일 오후, 관람객은 나밖에 없었다.
유치환은 1908년 경남 통영의 태평동에서 한의였던 유준수의 8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남은 극작가인 동랑 유치진이다.
그의 부친은 본래 이웃 거제군에서 살았으나, 결혼한 뒤에 처가가 있던 통영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고 한다.
청마는 외가에서 태어나 11세 때까지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배웠다.
어린 시절 그는 말이 별로 없는 소년이었다. 학교 종이 울리더라도 뛰어가는 법이 없이 조용히 걸어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로 들어갔다.
그가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豊山) 중학교에 입학한 것은 1922년이었다. 그의 형 유치진은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
그의 내성적 성격은 중학 시절에 더욱 심화되었다. 일본인 친구들을 사귀는 대신에 그는 혼자 책을 읽고 무언가를 쓰는 일에 열중했다.
관동대지진 이후, 그는 주일학교에서 만난 소녀에게 매일같이 편지를 보낸다. 그 소녀는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된 권재순 여사이다.
도요야마 중학 4학년 때 부친의 사업이 기울자 그는 1926년 귀국하여 동래고보 5학년에 편입한다. 그 후 그는 1928년 연희전문을 입학했으나 1학년 때 중퇴하고 만다.
사진관을 경영하는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그 시절, 진명 유치원의 보모로 있던 권재순과 결혼한다.
그 당시에는 드문 신식 결혼식이었다. 이 결혼식 때 신랑신부 앞에 꽃바구니를 들고 서 있던 어린아이 중의 하나가 훗날 시인이 된 김춘수씨였다.
(청마 문학관에서 그 사진을 찾아보러 했으나 찾지 못했다.)
권재순과 결혼한 후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의 작품을 살펴보고 이듬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 후 그는 일본의 아나키스트들과 정지용의 시에 깊은 영향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청마는 1931년 24세 때「문예월간」2호에 「정적」이라는 시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게 되었다.
이 때 청마는 비슷한 또래의 통영 문학청년들과 어울려 다니며 술을 마시곤 했다.
그의 장래를 불안하게 생각하던 아내는 시아버지와 청마를 설득하여 거처를 평양으로 옮긴다. 청마는 평양에서 사진관을 경영했으나 여의치 않자 이내 걷어치우고 시를 짓는 데에만 전념한다.
그의 아내는 청마에게 평양의 신학교 진학을 권유했으나 그는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고 거절한다. 다시 거처를 부산으로 옮긴 것은 1934년이고, 부산화신연쇄점에 근무했다.
30세 되던 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통영 협성상업학교 교사가 된 것을 계기로, 이후 교육계에 종사하게 된다.
이 때 문예동인지 '생리(生理)' (창간일 : 1937. 7. 1)를 주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다음해 불운하게도 여자 문제가 얽힌 데다가, 통영경찰서에 근무하던 남 순사라는사람으로부터 그가 일제의 예비 검속 대상자에 포함되어 있음을 귀띔 받고, 가족들을 거느리고 인생을 다시 한 번 재건해 보려는 의도로 만주로 떠나게 된다. 만주의 연수현에 형 유치진의 농장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 곳에서 일을 했다.
광복 직전인 1945년 6월에 귀국하여 광복을 맞이하였고, 통영여자중학교 교사(1945. 10 ∼ 1948)가 된 그는 45년 11월에 윤이상, 김춘수 등과 같이 통영문화협회를 조직하고 그 회장이 되어,
문화유치원(그의 부인이 경영)을 포함하는 4동의 적산을 인수하고 '연극 부락' 중심의 예술 활동을 벌여 나간다.
1950년 북한 남침과 더불어 부산으로 나온 그는, 부산에서 문총 구국대 조직에 참여한 후 3사단과 함께 종군하여 원산, 함흥 등지를 돌며 병사들과 함께 전쟁의 아픔을 겪었다.
이 경험으로 잘 알려진 시 '보병과 더불어'(50), '돌아오지 않는 비행기'(50. 4) 등이 쓰여졌다.
이쯤에서 청마에게는 운명의 여자였던 정운의 이야기를 해보자.
시인 이호우의 여동생인 정운(이영도)은 재색을 갖춘 여인으로 출가했으나, 결핵으로 남편을 잃고 말았다. 딸 하나를 낳고 홀로 있다가 해방되던 해 가을, 통영여중 가사 교사로 부임했다.
해방이 되자 고향에 돌아와 통영여중 국어교사가 된 청마의 첫눈에 시조시인 정운은 깊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일본으로 만주로 오랜 방황과 고독으로 지쳐 돌아온 서른 여덟살의 청마는 스물아홉의 청상 정운을 만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불길이 치솟았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위의 청마의 시 '그리움'은
"뭍같이 까딱않는" 정운에게 바친 사랑의 절규였다.
"이렇게 고운 보배를 나는 가지고 사는 것이다. 마지막 내가 죽는 날은 이 보배를 밝혀 남기리라 "
청마가 남긴 글이다.
청마는 1954년에는 거창 안의중학교 교장(54∼55)이 되었고, 그 후 경주고(55∼61), 경주여중(61∼62), 대구여고(62∼64) 등의 교장으로 근무하다가, 경남 문교 사회국장이던 오복근의 주선으로 경남여고 교장(64)으로 옮겼다.
청마가 세상을 뜬 것은 1967년 2월 13일이었다. 그날은 고교 후기 입시날이었다. 부산남여상 교장으로 있던 청마는 학교일을 마치고 예총 일로 몇몇 문인을 만났고, 그들과 어울려 몇 군데 술집을 들렸다.
그런 후 그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던 청마는 좌천동 앞길에서 한 시내버스에 치였고 부산대학 부속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절명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끈임없이 이어지던 편지(연서)도 끝이 났다.
이영도 시인은 그 편지들을 한권의 책으로 엮어서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제하로 발간하였다.
시인 유치환은 살아 있는 동안에 많은 여인들을 연모했고,
그 쉬지 않는 연모에서 시를 길어냈다.
청마는 어느 글에선가 "나의 생애에 있어서 이 애정의 대상이 그 후 몇 번 바뀌었습니다. 이같은 절도 없는 애정의 방황은 나의 커다란 허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자성의 빛을 비치기도 했다.
@ liberum 2009-12-04 = 記
√ 시인 청마 유치환 베스트 컷 5
→ https://buck4514new.tistory.com/m/47
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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