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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서 부르는 소리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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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

Life of Martin Luther and the heroes of the Reformation

(右)

John Calvin

 


(左)

Erasmus

(右) Saint Bartholomew

's Day massacre, Painting by

François Dubois

(born about 1529, Amiens, Picardy)



 



(左) Reformation and Counter Reformation in Europe. Protestant lands in blue (with gains and the losses due to the Counter Reformation),

Catholic

in olive

(右)

Luther's 95 Theses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Ⅰ. 서  론

 

  중세 유럽은 정체되고 변화가 느린 사회였다. 그러나 14세기부터 시작된 르네상스(Renaissance)와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宗敎改革)을 거치면서 유럽사회는 그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게 된다. 동아시아나 비잔틴 제국보다 낙후되었던 유럽 문명은 이 두 사건을 거치며 크게 발전하여 이후 세계 질서를 주도하게 되었다. 또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한 지류로 보기도 하고, 결과로 보기도 하는데, 이것은 르네상스가 자연과학의 발달과 발명을 요구함과 동시에 순수하게 인간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본주의 (人本主義)를 추구하고, 종교개혁도 그 목적이 초자연적 은총에 의한 이신칭의(以信稱義 : 믿음으로 의롭게 됨)로서 순수한 기독교적 신앙을 재발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인간중심의 르네상스와 절대적인 유일신과의 관계를 정립한 종교개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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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본  론
 
1. 르네상스(Renaissance)

  
  1) 르네상스란 무엇인가?

    르네상스란 프랑스어로 '재생' '부활'을 의미하며, 14~16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고대 그리스, 로마의 고전 문화의 재생과 부활을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고전의 모방에 그친 것이 아닌 고전연구를 통해 인간성의 풍부함과 합리적인 것을 추구한 문화 운동으로 서양 근대 사회를 형성한 밑바침이 되었다.
  르네상스의 근본정신은 휴머니즘(humanism, 인문주의, 인간주의)인데, 이것은 인간존중과 자아의 자각 등을 중요시 한다. 르네상스는 14세기 이탈리아 에서 먼저 일어났는데 피렌체로부터 시작해서 움브리아, 파도바, 베네치아 등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16세기에는 알프스 이북의 독일,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으로 확대되었다.

  2)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1) 이탈리아에서 가장 먼저 르네상스가 일어난 이유
  당시 이탈리아는 중앙 집권적인 국가가 아니라 다수의 도시 국가와 공국, 교황령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 도시의 지배 세력들은 지중해 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모았으며, 교황으로 대표되는 가톨릭 등 기존의 권위에 대항 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이러한 상업 귀족과 시민층이 새로운 문화 운동인 르네상스의 후원자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탈리아는 로마 제국의 본거지였기 때문에 다른 어느 곳보다도 고전, 고대 문화의 유산이 풍부하게 보존 되어 있었다. 여기에 비잔틴 제국의 멸망(1453년) 전후부터 제국의 학자와 문화인 다수가 이탈리아 반도로 이주해 왔는데 이들을 통해 고전 문화를 흡수하게 된다.

   (2) 르네상스의 전개
    - 피렌체 시대
   르네상스는 이탈리아 내에서도 금융업, 모직물 공업 등으로 번영한 피렌체에서 가장 먼저 꽃을 피웠다. 이미 12세기에 모직물 제조와 판매로 급성장한 피렌체에서는 13세기 무렵 대상인과 금융업자를 중심으로 한 부르주아지가 봉건 귀족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했다. 상공업이 발전하고 민주주의가 확대됨에 따라 노동자의 파업이 늘고 하층민의 정치 참여 요구도 커졌다. 이러한 계급간의 대립은 시민들에게 불안감을 주어 시민들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유지시켜 줄 강력한 지배자가 나타나기를 바라게 되었다.
  이때 금융업자인 메디치가의 코시모가 피렌체의 지배 세력으로 등장했다. 그는 공화정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강력한 통치를 행사해 피렌체의 번영과 르네상스를 뒷받침 했다.
  피렌체의 소귀족으로 태어난 단테(1265~1321년)는 이탈리아 각지를 유랑하면서 대서사시「신곡」을 썼는데 이책은 주인공인 단테 자신이 기독교 사후 세계인 지옥, 연옥, 천국을 두루 다니며 세계 속에서 인간의 위치와 신의 영광을 깨닫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단테의 신곡은 라틴어가 아니라 토스카나 지방의 구어로 씌여졌다는 점에서 이탈리아 국민 문학의 출발점이 되는 기념비적인 저작이다.
  피렌체에서는 단테 이외에도 페트라르카(1304~1374년), 풍자물「데카메론」을 쓴 보카치오(1313~1375년) 그리고 르네상스 회화의 효시인 조토(1266경~1337년) 등이 나타났다.

   - 르네상스의 전성기
  15세기에 들어서면서 경제적 번영 속에서 군주들은 자신의 권력과 재력을 과시 하기 위해 예술을 후원했는데 그들은 특히 조각, 회화 등 미술을 애호했다.
  브루넬레스키(1377~1446년)는 자신의 고향 피렌체에 대성당을 건축했는데, 이전까지의 고딕 양식과 달리 로마의 돔과 아치 형식, 그리스의 열주식 등을 절충해 건축에서 르네상스 양식을 확립했다.
  미술에서는 보티첼리(1444~1510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년), 미켈란젤로(1475~1564년)가 유명하다. 보티첼리는 대표작「비너스의 탄생」에서 관능적인 여성미를 표현했으며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영광에 대한 낭만적인 갈망과 인생에 대한 열광적인 기쁨을 제시하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최후의 만찬」과「모나리자」를 그렸고 뛰어난 예술가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세계에 대해 깊은 사색을 한 철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미술이외에도 기계 공학과 비행기의 원리, 해부학 등의 분야에서도 커다란 재능을 발휘했다. 미켈란젤로는 회화, 조각, 건축에서 이름이 높았는데 대표작은「다비드 상」과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정화인「천지 창조」와 벽화「최후의 심판」이다. 그의 작품의 중요한 주제는 강렬하고 설득력 있게 나타나는 인문주의이다. 그는 인간의 정념 고상함을 예술의 가장 적합한 주제라고 생각했다. 그의 작품들은 르네상스 양식을 넘어서 바로크 양식을 선구로도 간주 된다.
  정치 철학 분야에서는 마키아벨리(1469~1527년)가 유명하다. 그는 보편성이나 윤리성과 같은 중세의 정치 철학의 개념에서 이탈하여 국가를 완전히 주권적이며 독립적인 단위의 근대적인 형태로 생각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공화국의 제2 총독 겸 장관으로 봉직하기도 했는데 그 지위를 박탈당했고 그 후 해외에서 저작 활동으로 남은  여생을 보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저술했는데 그 책에서 그는 통치자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가 지배하고 있는 국가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공언했다. 정의, 자비, 조약은 통치자의 목적을 성취하는데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마키아벨리는 인간은 권력욕이나 물욕 같은 구체적인 동기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 로마와 베네치아 시대
  15세기말~16세기 무렵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은 로마와 베네치아로 옮겨갔다. 로마에서는 성모자상을 그려 유명해진 라파엘로(1483~1520년)가 활약했고 베네치아에서는 조르조네(1478~1510년), 티치아노(1477~1576년), 틴토레토(1518~1582년)등 세 사람의 거장을 필두로 해 베네치아 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활동했다. 베네치아의 화가들은 무역에 기반한 부유한 도시의 현세적이고 향락적인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명랑하고 화려한 색체를 사용한 회화 작품으로 16세기 후반 이탈리아의 회화 활동을 주도했다. 이들의 그림은 인간의 정신 보다는 감정에 호소한다. 베네치아의 아름다운 황혼과 반짝거리는 은색의 달빛 등과 같은 자연의 아름다움은 물론 사치스러운 궁전과 풍요롭고 현란한 융단 그리고 빛나는 보석 등과 같은 인간이 만든 아름다움이  이들의 그림의 주제였다. 이들의 그림은 중세말 비잔틴을 통해 유입된 동양적인 화풍의 흔적과 부유한 부르주아의 풍부한 미적 감각을 반영하고 있다.

   (3)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쇠퇴
  16세기 이후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쇠퇴하는데,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15세기말의 지리상의 발견 이후상업의 중심은 지중해의 이탈리아 도시들에서 대서양 연안의 도시들로 옮겨 갔고, 이에 따라 이탈리아의 경제력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다음 원인으로는 새로운 문화의 추진자 이자 보호자인 상층 시민이 서서히 보수화, 귀족화 되어간 것이다. 인습과 권위에 대한 비판이 제대로 수행 되지 못함으로써 르네상스 정신이 쇠퇴해 갔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는 국제적인 세력 관계에 큰 영향을 받았는데 1494년 프랑스의 샤를 8세가 나폴리를 침입한 것을 계기로 하여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프랑스의 세력 다툼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정치, 경제적으로 쇠퇴하게 되었고, 이는 르네상스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3) 북부 유럽의 르네상스

  16세기에 접어들어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가 쇠퇴했지만, 알프스 이북의 서유럽에서는 오히려 르네상스가 새롭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북부 유럽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와는 사뭇달랐다.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도시적이고 시민적인 것이었음에 반해 북부 유럽의 르네상스는 국민 국가의 궁정을 중심으로 전개 되었다.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태어난 에라스무스(1466~1536년)는「우신예찬」이란 작품으로 교회와 성직자들의 타락과 어리석음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공격했다.
  영국에서는 토마스 모어(1478~1535년)가 「유토피아」란 작품을 통해 당시 영국 사회의 불합리와 부정의를 규탄했고, 엘리자베스 여왕 시기에 뛰어난 극작가인 세익스피어(1564~1616년)가 출현하여 르네상스 국민 문학의 완성을 가져왔다.
  프랑스에서는 라블레(1494~1553년)가「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이라는 작품을 통해 당대 사회를 재치 있게 풍자하고 비판했다. 또한 몽테뉴(1533~1592년)는「수상록」을 저술하여 모든 교리와 진리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강조했다.

  에스파냐에서는 세르반테스(1547~1616년)가 「돈 키호테」라는 작품을 통해 몰락해가는 봉건제도와 귀족의 위선을 고발했다.
  미술을 보면 플랑드르 파의 거장으로 알려진 루벤스(1577~1640년)가 웅장한 구도, 화려한 색체, 야성적인 리듬감과 역동적인 선을 가진 작품을 다수 남겼다.
  같은 플랑드르 파의 브뤼겔(1520~1569년)은 플랑드르의 자연과 민중에 뿌리를 둔 사실적 기법의 그림을 많이 그려 ‘농민 화가’라고 불렸다.
  독일에서는 뒤러(1471~1528년)가 유명한데 그는 중세의 고딕 정신에 인간의 존엄성을 고취하는 새로운 르네상스 사상을 불어넣으려고 했다.
  북부 유럽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화려함에 비해 내성적이고 사색적이었다. 또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주도층이 시민이었던 것에 반해 북부 유럽에서는 성장 중인 왕권에 기초한 궁정이 중심이었다.
  고전 문화에 대한 태도 면에서도 이탈리아는 탐미적이었지만 북부 유럽에서는 냉정하고 연구적인 경향이 강했다. 북부 유럽의 르네상스는 종교적인 목적이나 실용적인 목적과 결부된 문학과 철학의 연구에 집중 했고 원시 기독교와 그 근거로서의 성경 원전에 관한 해석 등 기독교적 인문주의가 발전했다.

 

 2. 종교개혁(Reformation)

 

  1) 종교개혁의 배경 

  16세기 유럽사회는 르네상스의 결과로 새로운 발명과 발달이 이루어지고, 학문과 교육에 있어서 인문주의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지방 통치권과 중앙 통치권 사이의 반목은 자유도시에서 성장한 시민세력을 배경으로 맞물려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6세기의 로마 교황청은 재정적인 곤란에 처해있었다. 절대주의(絶對主義) 밑에서 영적(靈的) 문제뿐만 아니라, 세속적(世俗的)인 문제까지도 좌우해왔었던 로마 교회는 외모적으로 웅장하고 거대한 교회당과 사치스럽게 장식한 교황과 승려들에게 참된 의미에 있어서 종교와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이때야말로 종교의 암흑시대(暗黑時代)였으며, 일대 부흥을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했다. 이런 가운데서 순수한 기독교를 재발견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진정한 종교의 부흥을 꿈꾸며 종교개혁은 시작되었다.  

  2) 종교개혁의 원인

   (1) 면죄부(Indulgences)의 판매
  면죄부란 역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훌륭한 성자들이 축적한 공덕을 분양받음으로 신앙이 부족한 성도들의 죄를 용서받도록 하여주는 혜택을 주어 금생과 내생에 받아야 할 형벌을 면제해 준다는 로마교회의 교리로써 이것은 본래 회개를 전제로 만든 제도였다. 어떤 죄에 대한 현세적인 형벌들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사후에 연옥(Purgatory)에서 처벌이 요구될 터이므로 로마교회의 면죄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5세기 이후에는 그것을 더욱 크게 장려하고 확장했는데, 당시 교회의 재정부족과 베드로 대성당의 막대한 공사비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남용된 면죄부는 부패와 타락의 면죄부로 전락되었고 16세기의 종교개혁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2) 로마 교황청의부패와 왕조국가의 출현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의 교황은 알렉산더6세(Alexander Ⅵ, 1492~1503)와 율리우스2세(Julius Ⅱ, 1503~1513)였다. 알렉산더 6세는 로마 교황청의 영토확장을 위해 그의 첩에게서 출생한 아들 케자르 보르기아(Cesare Borgia)를 내세워 로마 교황청의 영토 확장을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또 교황들은 교회를 위해 독신제도를 수호해야만 한다고 했으나 많은 아이들을 낳았으며, 사치와 감각적인 생활에 탐닉했다. 또 현실정치를 내세우며 그들은 마치 그들에게 속한 이탈리아 권력가들처럼 교회 국가를 통치하였다. 개혁초기를 담당했던 교황 레오 10세(Leo Ⅹ,1513~1521)역시 유력한 금융업자 메디치(Medici) 가(家)의 차남으로 전쟁을 잘 수행한 정치가였으나, 종교가로서의 신앙은 거의 없었으며 권익증강에만 최선을 다했다. 이처럼 계속되는 부패와 타락 속에서 로마교회는 큰 돈이 계속 필요한데 비하여 유럽 여러 나라들에게서 들어오는 수입금은 국가주의의 출현으로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다. 심지어 고리대금업자들에게서 차용한 돈 때문에 이자까지 지출해야 했으니, 재정의 악순환과 부패는 날이 갈수록 계속되었다.

  3) 루터와 독일의 종교개혁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의 아이슬레벤(Eisleben)에서 한스 루터(Hans Luther)와 마가렛 루터(Margaret Luther)의 여덟 명의 자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497년 라틴 학교를 졸업한 후, 1498년부터 1501년가지 아이제나흐(Eisenach)에 있는 학교에서 공부했다. 1501년 4월에는 에르푸르트(Erfurt)대학에 진학했는데, 매우 근면했으며 유식한 철학가와 음악가로 추앙받았다. 1505년에 법과대학에 진학했는데, 여행도중 갑작스런 낙뢰(落雷)에 맞아 친구가 사망하자 크게 충격을 받고 수도승이 되기로 서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수도생활에 최선을 다해도 마음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번민하였는데  이 고민을 성경 연구를 통해서 즉, 복음적 진리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루터는 성경 연구에 몰두하였고, 이것을 통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회의를 품고, 복음에 대해 각성하게 되었다. 

  1517년 10월 31일에 루터는 ‘95개조’라고 불리는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비판하는 문서를 비텐베르그대학에 부착했다. 알브레히트(Albrecht, 1490~1545) 대주교는 루터를 교황청에 이단자로 고발하였지만, 루터를 지지하던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요청으로 아우부르크의 의회에서 심문을 받도록 배려해 주었다. 하지만,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고, 1520년 레오 10세는 루터의 모든 저서를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루터는 그해 교회법률서와 파문위협의 교황칙서를 소각함으로써 교회와의 단절을 공식화 하였다. 한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알5세는 루터와 그이 추종자들에게 국가적 법익을 박탈하고 추방령을 내리는 ‘보름스 칙령’을 공포하였고, 루터는 프리드리히의 보호아래  바르트부르그(Wartburg)에 은거해 있었다. 이때 지방영주들에 대한 농민 봉기가 있었지만, 루터는 과격한 지도자들을 비난하면서 독자적인 중도적 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같은 소극적인 태도와 농민들에 대한 탄압은 많은 지지 세력을 상실하게 하였고, 상당수의 지지자들이 재세례파로 나뉘어졌다. 

  1526년에 열린 제 1차 슈파이에르 의회(Diet of Speyer)에서는 그 지역의 종교는 그 지역 통치자의 종교로 하는 지역별 종교선택의 자유가 잠정적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1529년에 터키의 공격에 대비하고 신교운동의 확산방지를 위한 제 2차 슈파이에르 의회가 개최되어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한 보름스 의회(Diet of Worms, Wormser Edikt)의 칙령에 따라 1차 의회의 결정사항을 번복하면서 로마 카톨릭 신앙만이 유일하고 합법적인 신앙이기에 모든 이는 가톨릭 신앙에 남아야 한다고 결정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결정에 루터를 지지하는 제후들이 항의하였고, 가톨릭 회복을 내세운 제국 정책에 대항하기로 한 제후들은 슈말칼텐(Schmalkalden)동맹을 체결하게 된다. 1532년 봄에 터키의 슐레이만(Sultan Suleinam)이 침략하려하자, 황제는 프로테스탄트와 누렘부르그에서 화약을 맺었다. 

황제를 도와 터키군을 격퇴시킨 프로테스탄트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더욱 확고히 할 수 있었고,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황제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가톨릭 교단에 대항하는 슈말칼텐 동맹은 그 위치를 보다 확고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황제는 양측 종파들에게 상호간의 관용을 보증하여 1555년 9월에 아우구스부르그 평화회의를 개최하여 종교화약을 맺게 하였다. 이것으로 지역별로 종교 선택의 자유가 허락되었으며,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동등권이 인정되었다. 이제 루터파는 독일 내에서 완전히 건설되었으나 루터가 꿈꾸던 전 독일민족의 하나의 깨끗한 교회는 좌초(坐礁)되었고, 신 구교는 영원히 갈라지고 만다.

  4) 쯔빙글리의 취리히를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

  울리히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는 1484년 1월 1일 세인트 갈(St. Gall)현에 있는 토겐부르그(Toggenburg)라는 도시의 빌트하우스(Wildhaus)에서 한 농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지역 행정서기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여유가있었다. 8살 때 베젠(Wesen)학교에 입학하였으며, 다시 베른(Berne)으로 옮겨가 수학하였다. 특히 에라스무스(Erasmus, 1469~1536)의 사상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에라스무스의 교제는 스콜라철학을 떠나 성경연구에로의 길로 인도했으며,  바울서신 연구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1506년부터 신학수업을 시작하였고 그해 말에 콘스탄쯔(Konstanz)에서 신부로 임직되어 글라루스(Glarus)교구의 사제로 취임하였다. 여기서 그는 전투에 두 번 참전하였고, 용병제도(傭兵制度)의 문제점을 알게되어 이 제도를 반대, 비판하는 설교를 시작하였다. 

  1521년 찰스5세와 교전상태에 있던 프랑스와 프랑소와 1세는 스위스에 파병을 요청하였는데, 그는 교황의 용병파병 요청을 단호히 거절하였고 교황의 권력남용을 실감하게된다. 또 1552년에 취리히 교회 지도자들이 사순절(Lent) 금식을 지키지 않고 소세지를 먹은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시의회는 이들을 투옥하고 벌금형에 처하였다. 쯔빙글리는 먹는 음식을 금지하는 것은 교황의 법령이 복음에 의해 선포된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라고 비난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달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직 성서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콘스탄쯔의 주교가 쯔빙글리를 고발하자, 1523년 제 1차 토론회에서 교회개혁을 위한 자기입장을 쉽게 요약, 정리한 「67개조」를 논쟁의 근거로 사용하였다. 시의회는 쯔빙글리의 개혁안을 채택하였고 미사제도는 인정하되 성상폐지론은 결정하였으며, 신자들의 성가, 오르간 음악 등 성서에 명시되지 않은 모든 예배수단을 제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미사와 관련된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반대하며, 새로운 양식에 의한 성찬식을 거행하였다. 

여기서 그는 루터와 성만찬 논쟁을 일으키게 되는데, 루터는 성찬식에 상징적 성격이 있는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성찬에 실재(實在)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이러한 주장을 거부하였고, 성찬식은 순전히 상징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취리히의 시의회가 개혁을 더디게 주장하자 일부 과격하고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재세례파는 쯔빙글리와 결별하였다. 

  1529년 4월,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주들이 스위스의 오랜 숙적이었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그(Habssburg)가(家)의 페르디난트 공작과 동맹을 맺자, 쯔빙글리는 프로테스탄트 주들이 먼저 군사적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이때 체결된 조약을 제 1차 카펠 평화조약(The First Peace of Cappel)이라고 하는데, 이 조약은 로마 가톨릭을 지지하는 주들이 페르디난드와 맺은 조약을 취소하는 한편, 복음적 교회들의 존립을 허용할 것을 규정하는 조약이었다. 전운이 감돌자 쯔빙글리는 가톨릭 주들에 대한 밀, 소금, 포도주, 철 등의 거래를 금지하는 경제 봉쇄령을 내렸다. 이에 반대하여 가톨릭 주들은 1531년 취리히를 침공하여서 승리하였고, 제 2차 카펠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프로테스탄트들에게 불리하게 적용되어서, 더 이상의 영토확장을 금지시키고, 프로테스탄트 지역에서의 가톨릭교도의 예배의 자유를 허락해주었다. 쯔빙글리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5) 칼뱅과 제네바 종교개혁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피카르디(Picardie)현의 노용(Noyon)에서 신흥 중산층이었던 제라 꼬뱅(Gerard Cauvain)과 쟌느 르 프랑스(Jeanne le France)의 다섯 아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노용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후 1523년 파리로 유학간 칼뱅은 그곳에서 라틴어와 인문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1529년 오를레앙(Orleans)대학에서 성서의 중요성을 인식하였고, 1533년 파리로 돌아온 칼뱅은 친구 니콜라스 콥(Nicolas Cop)이 파리대학 학장으로 취임하는 연설문을 작성하였다. 이 연설문은 소르본느 대학과 그 신학자들의 완고함을 비판하고,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을 동조하였다. 또 복음주의적 신앙을 강하게 표현하였는데, 이로 인해 칼뱅과 콥은 파리를 떠나게 된다. 

  1534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성직록(benefice)을 포기하고 가톨릭 교회와의 결별을 선언하였다. 그는 바젤로 도피하여 프로테스탄트 최고의 저서인 「기독교강요」(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를 발간하게 되는데, 개혁주의 교회(Reformed Church)의 신학적 체계를 형성한 책이었다. 칼뱅은 스트라스부르그로 갈 생각으로 제네바를 경유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빌헬름 파렐의 제네바의 개혁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고, 개혁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536년, 그는 가톨릭측과의 신학토론을 벌이고 1537년에 「제네바 교회를 위한 신앙지침과 신앙고백서」를 출판하여 시의회가 서약하도록 하였으나 주민들의 저항이 강하게 일어났고 칼뱅과 파렐은 제네바에서 추방되었다. 

1540년 새로 들어선 정부가 여러파로 갈라지면서 혼란이 가중되자, 시의회는 그가 다시 돌아오기를 요청하였고, 칼뱅은 새로운 교회제도를 조직하기위해 교회규정(Ecclesiastical Ordinances)을 만들었다. 칼뱅은 국가의 독립성을 인정하면서도 교회와 긴밀한 관계 하에 두었고, 제네바시를 하나의 교회적 구조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제네바시의 질서를 유지하고 시민들의 생활을 감독하고 정화하기 위해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되는 감시위원회 즉, 평의회를 조직하였다. 이로써 제네바는 개혁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1559년 칼뱅은 제네바 신학교를 설립하여 거기에서 배출된 수많은 설교자들이 전유럽에 걸쳐 칼뱅의 교회제도, 신학과 사상 등을 전파하였다. 그의 사상은 프랑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와 영국 등지에서 청교도(Puritans)의 신교사상을 형성하여 폴란드, 헝가리에까지 침투되어 정신혁명에 크게 공헌하였다. 청교들과 함께 신대륙에까지 건너가 미국의 정신적 반석이 되었고 칼뱅의 제도는 불굴의 정신으로 힘차게 조직활동 할 수 있는 저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일에 전력을 다하던 칼뱅은 1564년 5월 27일에 숨을 거두웠다.

  6) 영국의 종교개혁

  영국의 종교개혁은 종교적 확신에서라기보다 정치적, 경제적 요인들이 강하게 작용되었다. 영국에서의 개혁은 국왕에 의해서 주도되었고, 국가의 보호 하에 이루어졌다. 헨리 8세의 이혼문제로 야기된 영국교회의 로마와의 결별은, 영국인들의 교회로서의 영국교회(Church of England), 즉 성공회(聖公會)가 국가적, 민족적 기독교회로 자리 잡게 된 것을 나타내었다. 1534년 헨리8세는 자신이 영국의 왕일 뿐만 아니라 영국 교회의 유일한 대표임을 선언하고 수장령(首長令)을 발표하였다. 영국 의회는 이것을 공식적으로 승인해 주었고 이것이 영국에서의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 이것은 영국 교회를 민족적 교회로 발전하도록 민족주의적 성격을 더해 주었고, 영국교회란 이름 자체가 민족주의적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헨리 8세가 죽고, 그의 외아들 에드워드(1547~1553)는 42개조 신앙고백을 제정하고 기도서를 작성하는 등 최초의 개신교 군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병약했던 그는 일찍 세상을 떠나고, 헨리8세에게 이혼당한 캐서린의 딸 메리(1553~1558)가 여왕에 오른다. 그녀는 가톨릭 신자임을 알리고 개혁운동을 박해하였는데, 이로 인해 메리는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메리가 사망하자, 그녀의 이복동생인 엘리자베스(1558~1603)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녀는 중도(中道)를 택하여 영국국교회를 확립시켰다.  

이처럼 영국에서의 개혁은 순수한 종교적 동기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고, 교황의 행정적 지배와 간섭의 단절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영국교회의 위계제도, 전례와 의식, 신앙과 삶은 전통적 가톨릭교회의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영국교회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중간적 형태를 띠고 있으며, 이 중용적인 성격은 영국개혁의 특유성이며 독자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7) 프랑스의 종교개혁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쯔빙글리와 칼뱅에 의해 발전된 개혁주의 신학운동은 프랑스에도 전개되었다. 16세기 당시,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루이 11세(1461~1483), 루이 12세(1498~1515)를 거쳐 프랑소와 1세(1515~1547)에 이르러 프랑스는 절대 왕권을 확립하였고, 강력한 중앙집권 정부를 형성하였다. 이 당시 프랑스의 교회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개혁되지 않으면 안 될 조건이었다. 고위 성직자들은 사치하였고, 하급 성직자들은 무지하였으며, 전반적으로 교회는 영적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었다. 교회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은 절박하였으나, 왕의 지배는 그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는 종교 그 자체의 문제보다도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처신했으므로, 일관성이 없었다. 프로테스탄트들을 지원했다가도, 그들의 수가 급증하는 것을 보고는 강경 정책으로 바뀌면서, 개혁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박해로 인한 피해가 늘어나자, 국제사회의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다. 

  1547년 3월 31일 프랑소와 1세가 죽고, 그의 아들 앙리 2세(1519~1559)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개혁자들에 대하여 보다 더 잔인한 박멸정책을 폈다. 그런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교회는 성장하였다. 1550년경부터 제네바에 망명중이던 칼뱅의 제자들이 귀국하여 복음 운동을 다시 시작했고, 프랑스 최초의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설립되었다. 

이 때 쯤부터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들은 위그노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위그노들은 상당한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고 단지 신앙공동체 뿐만 아니라, 정치적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앙리4세가 1598년 낭트 칙령(the Edict of Nantes)을 발표하여 위그노에게 예배의 자유을 허락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파는 계속하여 개혁파를 압박하였다. 루이14세의 낭트칙령 폐지와 계속되는 압박으로 인해, 프랑스 고위 상류층을 형성하고 있던 위그노 귀족들과 학자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스위스, 네덜란드, 영국과 미국 등으로 이민을 떠났다. 이것은 프랑스에게 인적, 물적으로 손실을 가져왔으나, 가톨릭은 계속 박멸정책을 고수하였다. 비록 프랑스에서 뿌리를 내리지는 못했어도 위그노들의 정신은 계속되었다. 

  8) 로마교회의 부흥운동(반동 종교개혁)

  1517년에 일어났던 개신교(Protestant)의 종교개혁 운동은 1572년쯤에 절정에 달하였다가, 그 후 수십년 동안은 발전하지 못하였다. 이때 로마교회는 잃었던 교구와 세력을 다시 회복하기 시작하여 그 전보다 더 강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로마교회는 여러 해 동안 내적으로 교회 자체의 혁신을 도모하고 외적으로는 적의 공격을 막고 개혁자들의 활동을 제지(制止)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을 가리켜 가톨릭 종교개혁 또는 반동 종교개혁(反動 宗敎改革)이라고 한다. 이것을 개신교의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반동 종교개혁은 개신교의 종교개혁과 거의 같은 시기의 것으로 공통적으로 표출된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9) 종교개혁의 의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종교개혁은 서구 역사에서 중세에서 근세로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어가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종교만의 차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사회적 변화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중세 생활의 모든 것이 교회로부터 출발하고 교회와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그것은 단순히 세속권력의 일부가 아니라, 세속권력 그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권력을 신적인 영역에 포함시켜 합리화 시켰으며, 그 당시 교황의 세계지배는 이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런 사회가 바로 중세사회였고, 바로 이것을 개혁하는 것이야말로 종교개혁이 가지는 참된 의의라 하겠다.

 

Ⅲ. 결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시기를 통해 유럽은 중세의 정체 상태를 벗어나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게되었다.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인간 중심의 휴머니즘 사상은 과학과 철학, 예술에 발전을 가져왔고, 학문의 새로운 탐구 정신은 전체주의적인 전통으로부터 인간을 개방시켰으며, 교권(敎勸)의 독재를 점차로 비판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루터에 의하여 점화된 개혁의 불길은 전 세계를 사로잡는 기틀이 되었고 근세사 초두(初頭)의 거대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교권과 세속권의 분리는 근대 민족국가의 출현을 가능케 했고, 당시 유럽을 중앙 집권적인 국가들로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으로 유럽은 봉건적 사상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사상과 제도를 가진 사회로 발달 할 수 있게 되었고, 이후 세계 질서를 주도하게 되었다. 이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진정한 학문과 종교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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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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