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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치 Chinese politics
북 리뷰
비록(秘錄)으로 돌아온 주은래(周恩來)--
주은래(周恩來)에의 “진혼곡”
독자들의 시선을 끄는 책이 일본의 서점에 나돌아 화제를 모으고 있다. 바로 “주은래 비록(周恩來 秘錄, 上・下)”이다.
주은래----중국공산당 시절과 중국건국 (1949)이래 수십년간에 걸쳐 중국의 정치와 외교를 통괄했고., 美中관계개선과 동서간의 데탕트라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가져오게한 장본인였다.
↑ 1972년 닉슨 美대통령의 방문을 받고 환담하고 있는 주은래(左).
이 때 미국측 파트너인 키신저로부터 “탁월한 외교전락가로서 위인(偉人)”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주은래.
키신저의 평가도 그랬었지만, 70년대초 국제사회에 얼굴을 보인 주은래의 모습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저 두려운 “죽의 장막”속에서 얼굴을 내민 주은래의 모습은, “무지막지한” 공산주의자의 모습이 아닌, 화사한 인텔리 외교가로서의 젠틀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중공에 저런 인물이 있었다니…수수하면서도 핸섬하고 지적인 풍모였다.
주은래는 중국에 대한 어두운 이미지를 많이 불식시켜준 인물이었다.
그가 키신저와 의기투합해 만들어낸 작품 “데탕트”는, 그 원류(源流)가 1648년 체결된 “웨스트팔리아 조약”에 있었다. 이는 30년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독일의 웨스트팔리아 지방에서 열린 유럽최초의 국제회의로서, 그 후 약 150년간 국제사회의 질서로 자리잡게 된다.
이 조약은 주권(主權)을 가진 독립된 국가로 구성되는 근대국제사회(近代國際社會)의 탄생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키신저와 주은래는, 주권국가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고(미국이 중국의 이념체계나 국내사정에 이의를 달지 않고),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어느 일방의 패권적 지위보다는 힘의 균형(밸런스 오브 파워= BOP)에 의한 국제질서의 유지에 합의했다.
패권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작동할 때 국제질서가 안정을 유지한다는 이론이 종래의 패권안정론으로, "팩스 아메리카나(미국이 패권을 유지하는 가운데의 평화) "가 그 전형(典型) 이었으나, 키신저는 이 패권안정론보다는 힘의 균형(밸런스 오브 파워= BOP)을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미국으로서는 중국을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국제사회에 있어서도 중국을 힘의 균형의 한 축으로 세워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새로운 질서하에서 '국제평화'와 안정를 모색하고자 한 것이 키신저였고, 주은래가 이에 동의했던 것.
그야말로 기존의 국제사회의 틀(시스템)과 규범을 완전히 뒤엎어버린 혁명적인 것이다. 누가 중얼거리지 않았던가?----“국제사회에는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고…
이 국제사회의 혁명적 신질서를 탄생하게 한 두 주인공 중의 한 사람인 주은래.
신간 “주은래 비록”에서는, 주은래가 죽음을 맞이하는 77세까지 모택동에 의해 고통과 고민을 강요받는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고 상술하고 있다.
애초에 전전(戰前)의 중국공산당 시절에는 주은래가 모택동(毛沢東)의 지위보다 높았다고 한다. 이것이 자존심이 강한 모택동에게 깊은 한(恨)을 갖게 했다는 것.
그러나 그 유명한 "장정(長征)" 후에 중국공산당이 연안(延安)을 본거지로 하면서, 모택동은 당의 정풍(整風)운동을 일으켰고 드디어 왕명(王明) 일파의 숙청에 성공하게 된다. 모택동은 계속하여 3개월간의 청산투쟁(淸算鬪爭)을 통하여 주은래를 철저하게 몰아붙였고, 이 때부터 양자의 위치와 지위는 역전을 하게 된다.
이 후. 주(周)는 모(毛)에게 몸을 낮추고 머리를 숙이게 되었고, 건국(1949) 이후도 은인복종(隱忍服從)을 반복한다. 이상한 이유로 유소기(劉少奇)가 축출당하고, "음험하고 악랄한 수법(?)"으로 임표(林彪)가 죽음을 당해도, 주(周)는 최종적으로는 모(毛)의 편을 따랐다고 한다.
이런 굵직한 사건들이 있었을 때의 주(周)의 행동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유들이 거론되어 왔지만, 혹자는 “충군애국의 유가(儒家)정치문화의 전통의 영향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래도 주(周)는 모(毛)의 계속되는 의혹의 눈초리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임표의 실각 후에 주(周)가 ‘넘버 투’에 부상했기 때문일 것이고, 무엇보다도 세기의 미중(美中)접근에 의해 주(周)의 명성이 국내외에서 하늘을 찌를 둣이 높아졌기 때문일 것이라는 분석이다.
주(周)가 겸허라고 자제심이 있고 밸런스 감각이 있는 인물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모(毛)의 눈에는 주(周)가 교활하고, 정치적 신조가 없고, 흐름을 읽는 안목 정도나 겨우 갖춘 인물로 비추어 졌던 것은 아니었나?
결정적인 것은, 모(毛)가, 문화혁명을 배후에서 부정하는 선봉에 서 있었던 인물이 바로 주(周)였다고 간주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무튼 병상으로까지 주(周)를 몰아부친 모(毛)의 성벽(性癖)에는 상상을 뛰어넘는 그 어떤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 책의 저저인 고문겸(高文謙)은, 계급투쟁에 의한 통솔을 절대적인 것으로 한 모(毛)에 비해, 주(周)는 ‘4개의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민정(民政)과 경제건설을 치국(治国)의 이념으로 하고 있었다고 대비시켜놓고 있다. 주(周)에게 상당한 호의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주은래에의 진혼곡(鎮魂曲)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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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은래의 생애 요약 |
[1976년] | 주은래 전 중국 총리 사망 | ||
주은래의 죽음은 그날 발표되지 않고 이튿날 새벽에서야 내외에 공표됐다. 장례 차량이 팔보산 혁명묘지로 향하는 거리에는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북경 시민들로 가득 메워졌다. 12일부터 14일까지 3일간 노동 인민문화궁에서 거행된 일반인 조문에는 건국 이래 26년간 수상을 역임한 위대한 지도자와의 영원한 이별을 애도하는 인파가 줄을 이었다. 그 수가 자그만치 백만명에 달했다. 도쿄와 파리까지 유학할 정도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주은래는 자신의 계급을 뛰어넘어 일생을 중국혁명에 바쳤다. 대학 재학 중 5.4운동 참여로 시작된 그의 혁명역정은 중국 공산당 파리지부 창설, 상해 봉기 지도, 남창폭동 지도, 광주코뮌 조직, 대장정 참가, 항일연합전선 결성 등으로 이어졌고, 1949년 공산정권 수립뒤 사망할 때까지 총리로서 중국혁명의 완수와 현대 중국의 건설에 온 힘을 쏟았다. (인터넷 웹 페이지) |
<사족>모택동과 주은래,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모택동을 더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있고, 반면, 주은래를 더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박정희와 JP의 관계도 저 둘을 닮았는지도 모른다. |
@ http://blog.joins.com/ja4514/8029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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