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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코노믹스'를 제창으나, 시진핑에 밀렸던 비운의 천재 리커창(李克強) '지상에서 영원으로'
중국의 리커창(李克強) 前 수상이 27일 새벽, 상하이에서 6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인은 심장발작. 시진핑(習近平) 지도부에서 경제정책 등을 담당했던 비운의 천재였습니다.
리커창의 죽음으로, 보스(후견인)를 잃은 공천단(共青団)은 이제 시(習)의 냉대 속에 완전히 몰락해갈 것으로 보입니다.
리커창은 안휘성(安徽省) 태생으로 유소년기엔 신동(神童)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 들어가기 힘든 베이징대(北京大)에서 법률을 공부했고 경제학 박사학위도 취득했습니다.
공산당 청년조직인 공산주의청년단(共青団=공청단)에서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주석의 측근으로 일하기도 했지요.
하남성(河南省)과 요녕성(遼寧省)의 당위원회 서기(書記)를 거쳐, 2007년부터 최고지도부인 당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었습니다. 수상으로서는 2013년부터 2기에 걸쳐 10년간을 일했습니다.
중국에서는 보통은 국가주석이 정치와 외교, 수상이 경제정책을 담당하는 역할분담이 있습니다. 리커창은 고도성장으로부터 안정된 경제로의 이행・발전을 제창,「리코노믹스(李経済学)」로 중국인민들에게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016년경부터 시진핑이 경제정책에의 관여를 강화하자, 李의 존재감은 서서히 저하했습니다.
시진핑은 측근인 류허(劉鶴)를 부(副)수상에 등용, 매크로 경제정책의 사령탑으로서 미-중 무역마찰에 대응하게 했습니다.
리커창은 올 3월의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代=전인대)에서 은퇴를 발표, 후임 수상으로는 시진핑의 측근인 리창(李強)이 취임했습니다.
리커창이 수상 재임 중일 때인 2013〜22년의 중국의 평균경제성장율은 6.2%였습니다. 그 기간 중에는, 신형 코로나 바이러스 재앙과 부동산 불황 등으로 중국경제에 많은 역풍이 불어닥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리커창의 68세(歳)로서의 죽음은 좀 이른 감이 있군요. 요즘 시대에 68세는 아직 젊습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증거는 없지만 암살설까지 나돌고 있습니다.
과연 리커창의 급사(急死)로 인해 중국정치가 어느 정도의 영향을 받게는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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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치계는 현역 외상(外相)과 국방상(国防相)의 실각(국방상은 아직도 공석)에 이어, 이제 '도탄바(土壇場 : 어려운 지경)'에서 리커창의 급사까지 맞이하게 됐습니다. 리커창의 사인(死因)을 규명하는 일은 차치하고, 이제는 시진핑의 '도쿠단죠(独壇場 : 독무대)'가 되어 있습니다. 시진핑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이제 아무도 없습니다.
리거창의 '리코노믹스'는 경제개혁노선이었습니다. 시진핑은 그것을 말살시켜 경제의 고(高)성장에만 집착했습니다.
그 결과는 ①부동산 버블과, ②지방정부가 몰래 빌린 빚(隠れ借金)의 팽창이었습니다.
거기에다 ③시진핑은 공동부유(共同富裕)라는 구실로 민간기업에의 국가통제를 강화했습니다.
한국의 하태경 같은 '애'가 이 시진핑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집니다. 하태경도 국가간섭・국가개입을 떠벌리고 있다 합니다. 물리학과를 나왔다는 자가 '쥐뿔'도 모르면서 뭘 그리 설치고 다니는지…? w~
아무튼 위의 세가지 원인이 섞여지며 지금 중국경제는 사경(苦境)을 헤매고 있는 것으로, 경제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습니다. 슈킨페이(시진핑)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개인숭배에만 힘을 쏟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중국의 현체제는 지금 위험한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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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후진타오(胡錦濤) 정권하, 공청단파(共青団派)와 장쩌민파(江沢民派 : 上海派=상하이파)가 차기정권의 이니시어티브를 놓고 쟁투를 벌일 때, 아이로니컬하게도 제3세력이라 할 시진핑의 태자당(浙江派=저장파)이 실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 때 '노망난 늙은이' 장쩌민이 욕심만 내지 않았더라면「리커창 국가주석 & 시진핑 수상」체제가 탄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체제가 탄생했다면 틀림없이 중국은 민주화와 개방을 향해 전진했을 겁니다. 그 체제와는 반대의 체제가 들어서, 중국은 지금 번영은 커녕 혼란을 겪고 있는 것 아닐런지요?
리커창의 죽음으로「개혁을 지향했던 공청단파」는 이제 완전히 종언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공청단은 시진핑에 의해 환골탈태되며 시진핑 사상을 필사적으로 실천하는 집단으로 바뀌어 갈 것으로 보입니다.
"진핑이, 좀 너무 하는 거 아니니?" ww~
시진핑 정권은 지금 폭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카산드라 크로싱(Cassandra Crossing)' 다리에 걸려 낭떠러지로 떨어지면 어쩔려고?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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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克強氏が死去. 不遇の秀才, 未完の「リコノミクス」
優秀すぎるがゆえに、改革をやり遂げられなかったのかもしれない。27日に68歳で亡くなった中国の李克強(リー・クォーチャン)前首相は、鄧小平が1978年に始めた改革開放の正統な継承者だった。その早すぎる死は、苦境にあえぐ今の中国経済とだぶってみえる。
忘れられない場面がある。2012年3月、北京の釣魚台迎賓館で開かれた経済フォーラムで、当時副首相だった李氏がスピーチに臨んだときだ。そばには国際通貨基金(IMF)のラガルド専務理事(現・欧州中央銀行=ECB総裁)がいた。
中国経済の現状を話し始めた李氏は突然、10秒近く沈黙した。「申し訳ない。今の数字は誤りでした」。いつもはメモを見ずに統計数字をよどみなく話す李氏が、外国の賓客を前に言い間違えをしたのだ。
重慶市のトップだった薄熙来氏が失脚した直後だった。5年に一度の共産党大会を目前に控え、党内の権力闘争が激しさを増していた時期である。その渦中にいたであろう李氏は、最高指導部の人事をめぐるすさまじい抗争を目の当たりにし、疲れていたにちがいない。
そうした権力闘争とは無縁の人生を送るつもりだったはずだ。屈指の名門である北京大学を最優秀の成績で卒業し、海外への留学を夢見ていたとされる。
しかし、中国共産党の下ですぐれた人間は自由を許されない。李氏は党の青年組織である共産主義青年団(共青団)の幹部候補生になり、枢要なポストを歩んだ。のちに国家主席になる胡錦濤(フー・ジンタオ)氏の下でも働き、その後継者と目されるようになる。
李氏が北京大で学んでいたときの恩師に厲以寧氏がいる。改革開放の理論的な支柱の一人で、「計画経済を捨て去るべきだ」と訴え続けた経済学界の重鎮だ。
13年3月に首相となった李氏は、恩師の教えを忠実に守ろうとした。「市場メカニズムには経済活動を自動調節する機能がある」。ことあるごとにそう説き、中国経済のさらなる市場化をめざす政策を掲げた。「リコノミクス」である。
資源の配分を市場に任せ、国有企業より民営企業の活力を引き出して経済の生産性を高める。そんな発展戦略は、党の指導を絶対視する習近平(シー・ジンピン)国家主席の考えと相いれなかったのだろう。李氏は次第に遠ざけられ、経済政策の主導権を失っていった。
李氏にすれば、精いっぱいの抵抗だったのだろうか。20年5月の全国人民代表大会(全人代)後の会見で「中国には月収千元(約2万円)前後の人が6億人いる。中規模の都市では家さえ借りられない」と発言して物議を醸した。
そこそこゆとりのある「小康社会」の実現は間近としてきた習氏を、否定したように聞こえたからだ。この発言で、李氏の党内における立場がいっそう悪くなったのは想像に難くない。
21年3月の全人代で政府活動報告に臨んだ李氏は、どこか痛々しかった。声がかすれ、コップの水を何度も口にした。
災害現場にはいつも真っ先に駆けつけ、ふつうの人びとから親しまれる誠実な指導者だった。李氏がもう少し権力闘争を勝ち抜くずるさがあり、リコノミクスをやり抜いていれば、中国の未来はまったく違っていたと思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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